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널 샌더스의 저주 (문단 편집) == 저주의 시작 == 우승 다음 해인 1986년, 한신은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칭호가 무색할 정도의 모습을 보였는데, 팀의 중심타자인 [[랜디 바스]]가 2년 연속 삼관왕을 차지하고 NPB 단일시즌 최고타율인 .389를 찍는 등 리그를 때려부쉈으나 또다른 주력들이 전년도만 못한 성적을 거두고, 팀 리더이자 4번타자인 [[카케후 마사유키]]가 사구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지는 등 여러 악재가 겹친 끝에 센트럴 리그 3위에 머무르고 말았다. 그것도 승률은 딱 5할이다.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87년, 한신은 승률 .331로 '''창단 이래 최악의 승률'''을 기록하면서 우승을 차지한지 불과 2년 만에 '''리그 최하위'''로 추락하고 말았다. 이 때 [[요미우리 TV 방송]]의 아나운서였던 모리 타케시[* 간사이 지방에서는 유명 아나운서로, 2015년 정보스포츠국 정보 프로그램 센터 차장을 맡고 있다. 방송국이 [[닛폰 테레비]]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안티교진에 한신 팬. 참고로 [[도쿄도|도쿄]] 출신이다.]가 방송에서 언급한 말인 "괴롭구만(なんぎやなあ)"이 유행어가 되면서 '커넬 샌더스의 저주'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다. 이듬해인 1988년에는 한신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던 외국인 타자 [[랜디 바스]]가 병을 앓고 있던 아들의 치료 문제를 놓고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퇴출되었고 [[카케후 마사유키]]가 1986년 입은 부상으로 잃은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[[은퇴]]하고 마는 끝에 2년 연속 리그 꼴찌를 기록하는데, 바스가 떠난 이후 한신 구단 대표 후루야 신고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'''투신자살'''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구단 내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. 그리고 나온 1985년 이후의 결과는 폭망 그 자체. 한신은 1992년 2위를 기록한 걸 제외하면 2002년까지 계속 B클래스를 찍으며 '''66566(2)[[4466566664]]''' 라는 5+10, 합계 15자리 비밀번호를 생성하면서 한 동안 엄청난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. 그 기간 동안 찍은 최하위가 무려 10회에 [[8888577]]처럼 4년 연속 최하위도 기록했다! 5할 승률을 넘긴 건 상술한 1992년이 전부였다. 심지어 그 2위도 전통의 숙적 '''[[요미우리 자이언츠]]'''와의 공동 2위, 그것도 승률은 '''67승 63패, 승률 .515'''로 5할 2푼을 넘기지도 못했다.[* 사실 그 2위도 1992년 [[센트럴 리그]]가 우승 팀 야쿠르트와 최하위 팀 주니치가 단 '''9게임'''밖에 차이가 안 날 정도로 박터지는 순위 다툼이 벌어진지라 어부지리로 얻은 것에 가까웠다. 1985년 이후로 계속 부진하던 팀이 이 정도면 꽤 선전한 거였다만 그 다음해부터 다시 폭망한 게 문제였다. 이 시즌에 [[한신 타이거스/1992년/9월/11일|야쿠르트와 일본프로야구 최장시간 경기]]를 벌이기도 했다.] 한신이 그렇게 리그 밑바닥을 까는 동안 [[마유미 아키노부]], [[오카다 아키노부]] 등 남아있던 우승 멤버들도 서서히 은퇴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사라져갔고, 그 빈 자리를 [[와다 유타카]], [[신조 츠요시]], [[히야마 신지로]], [[야기 히로시]], [[쿠지 테루요시]] 등 새로운 멤버들이 채웠지만 1985년 우승 당시의 막강한 전력에 비하면 다소 부족한 모습을 보여왔다. 한 술 더 떠 외국인 선수들은 아예 데려오는 족족 대차게 망해버렸다. 그나마 예외가 토마스 오말리였으나 1994 시즌 종료 후 야쿠르트로 보내버리고 그는 1995년 야쿠르트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한신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었다. 이 시기 [[마이크 그린웰]]이라는 [[일본프로야구]] 사상 최악의 [[먹튀]]를 낳은 건 유명한 일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